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링컨은 남북 화합을 강조했기 때문에 링컨이 살아 있을 때 남부는 북군 포로 13,000여 명을 아사시킨 수용소장 [[전범]]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Wirz|헨리 워즈]] 육군 [[대위]]만 [[사형]]에 처해지고 나머지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북부에서는 "남부를 박살내야 한다!"는 급진파가 힘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이때 부스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테러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남부는 1877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군정 치하에 놓였다.[* 독립 이후 미국 본토의 특정 지역이 군부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그나마 군정이 끝난 이유도 1876년 대선이 좀 찝찝하게 끝나고 남부에서 반발하자 당선인인 헤이스가 남부를 달래준다고 군정을 종료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남부 입장에서는 군정이 비극이었지만 그곳에 살던 흑인들에게는 필요한 군정이었다. 노예해방선언 이후와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이겼다고 해서 흑인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리 없었고 외려 [[쿠 클럭스 클랜]] 같은 작자들만 판치는 상황에 군정은 어느 정도 필요악이었다. 실제로 군정 시기에도 흑인에 대한 대우가 크게 나아지지 못했고 1876년 대선 역시 남부의 백인들이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하기 일쑤였다. 결국 그 군정마저 끝나자 흑인들의 권리는 군정 시기보다도 더 추락하여 100년 뒤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시대가 올때까지 짓밟혔다.] 또 남부 출신 사람들은 연방 공직 임명에서 무조건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았으며 북부인과 달리 충성 서약을 해야만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등의 유례없는 대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12년 뒤 군정이 종료될 때 같이 사라진다.] 이로 인해 남부 또한 링컨 암살 사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blogs.pjstar.com/civilwar381.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ccnews142_01_big.jpg|width=100%]]}}}|| ||<-2> 암살 가담자들의 공개 처형식. 사진 좌측부터 매리 엘리자베스 젠킨스 수랏(Mary Elizabeth Jenkins Surratt, 1820 ~ 1865)[* 회합 장소 제공과 여러 도움을 준 여관집 여주인으로, 부스와 공모해 링컨을 납치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석방되었던 존 서랏의 모친이다. 로버트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음모자]]가 그녀에 대한 재판을 다루었다. 미국 형사에서 최초로 직접 가담자가 아닌데도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된 사례이다.], 루이스 쏜턴 파월(Lewis Thornton Powell, 1844 ~ 1865), [br] 데이비드 에드거 헤롤드(David Edgar Herold, 1842 ~ 1865), 조지 앤드류 아트제로트(George Andrew Atzerodt, 1835 ~ 1865) || [[파일:external/media-2.web.britannica.com/125031-004-59CCD0E3.jpg]] 당시 부스가 사용한 데린저 권총은 회수되어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가 포드 극장을 당시와 같이 복원하면서 전시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1997년에 한 교도소의 재소자를 통해 전시된 권총이 오리지널이 아닌 복제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FBI는 조사를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 도난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여러가지 추적과 총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여러 조사와 비교를 해 본 결과 총은 진품이며 재소자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거짓말을 한 이유는 추측건대 복제품을 만들어 진품처럼 속여 팔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youtube(1RPoymt3Jx4)] 링컨 대통령 암살을 목격했던 마지막 생존자는 새뮤얼 제임스 시모어(Samuel James Seymour,1860~1956)다. 당시 5세로 극장에 있던 그는 총성이 울린 후 어떤 남자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고 아직 링컨이 암살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에 어떤 남자가 떨어진 사실에 대해서만 염려했다고 한다.[[https://news.google.com/newspapers?nid=1368&dat=19540207&id=wHUxAAAAIBAJ&sjid=SBAEAAAAIBAJ&pg=5624,3979599|참고]] 이후 2번의 세계대전을 거쳐 [[TV]] 시대까지 살아남은 시모어는 1956년 2월에 96세의 나이로 게스트의 비밀을 패널들이 추리하는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두 달 뒤 사망했다. 링컨 옆에 있다가 부상당한 래스본 소령은 대령까지 진급하고 [[독일 제국]]에 [[국방무관]]으로 파견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평생 링컨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급기야 1883년 12월 3일에는 아내[* 위 그림 속 왼쪽 두 번째의 여인으로, 사건 당시에는 약혼녀였다.]를 칼로 찔러 죽이고 두 아이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정신질환자]]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 독방에 30년 가까이 갇혀 있다가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